우치무라 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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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치무라 간조는 1861년 일본에서 태어난 기독교 사상가이자 저술가이다. 삿포로 농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교육칙어에 대한 불경 사건으로 교직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조직화된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무교회주의를 주창했으며, 러일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적 입장을 보였다. 그의 사상은 한국의 무교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대표적 일본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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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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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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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내촌 감삼 |
출생일 | 1861년 3월 26일 |
출생지 | 에도, 무사시국, 일본 |
사망일 | 1930년 3월 28일 |
사망지 | 도요타마, 요도바시, 도쿄, 일본 제국 |
국적 | 일본 |
학력 | |
모교 | 도쿄 영어학교 삿포로 농학교 애머스트 대학교 하트퍼드 신학교 |
학위 | 농학사, 이학사 |
직업 | |
직업 | 작가, 기독교 전도사, 교사, 신문 기자, 출판사 경영자 |
활동 분야 | 무교회주의 운동 |
가족 | |
부모 | 아버지: 내촌 의지, 어머니: 야소 |
배우자 | 아사다 타케(이혼), 요코하마 가즈코(사별), 오카다 시즈코 |
자녀 | 차녀: 내촌 루츠코, 장남: 내촌 우지유키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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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다마 묘원 |
2. 생애
다카사키 번사 우치무라 요시유키의 장남으로 에도 고이시가와(小石川)에서 태어난 우치무라 간조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학교를 다니던 중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기도 모임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는 그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1882년 대학교를 졸업한 우치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독립교회를 통해 서구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이 공동으로 운영했고, 일상적인 교회 일은 함께 처리했으며, 그 외의 것은 투표로 결정했다.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 일해야 했다.
1884년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 3학년으로 편입하여 명예상을 받고 졸업한 뒤 하트퍼드 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4개월 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지난 3년 간의 극심한 정신적 긴장으로 신경이 불안정해지고 매우 심각한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휴식이나 진정제, 기도도 효과가 없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38]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취직하였다.
1891년 일본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 봉독식 때 예를 갖춰 인사를 하지 않은 '불경사건'으로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파(尊皇派)들에게 미움을 받아, 보복 테러의 표적이 되어 아내와 자식, 그리고 직장을 잃었다. 우치무라는 교원으로 활동하면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How I Became a Christian''), 《구안록》(求安録) 등을 저술했다.
또한 《요로즈 조호》(萬朝報)지의 기자와 월간지 《성서지》 연구의 간행인으로도 활동했다. 1921년에는 도쿄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많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다카사키 번사 우치무라 요시유키의 장남으로 에도 고이시가와(小石川)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언어에 재능을 보여 11세에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13세에는 영어를 계속 공부하기 위해 외국어 학교에 입학하여 정부 관련 직업을 가질 계획을 세웠다.[3] 메이지 6년(1873년)에는 단신으로 상경하여 아리마 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때 동급생으로 훗날 일본은행 총재가 된 미시마 야타로가 있었다. 아리마 학교에서 1년간 배운 후, 도쿄 외국어 학교 (현 도쿄 외국어 대학교)의 하등 제4급으로 편입했다. 이때 동급생으로 스에마쓰 겐초, 아마노 타메유키, 사토 쇼스케 등이 있었다.1877년, 삿포로 농학교(현재의 홋카이도 대학)에 입학했다.[3] 삿포로 농학교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설립한 학교로, 클라크는 농업 기술뿐만 아니라 성경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했다. 그의 모든 학생들은 개종하여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언약"에 서명했고, 성경을 계속 공부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클라크는 1년 후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우치무라는 그의 영향을 받아 1878년 감리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84년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 3학년으로 편입하여 명예상을 받고 졸업한 뒤 하트퍼드 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4개월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2. 2. 기독교 신앙과 무교회주의
다카사키 번사였던 우치무라 요시유키의 장남으로 에도 고이시가와(小石川)에서 태어난 우치무라 간조는, 미국 농학자인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학교를 다니던 중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대학생 시절 그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구성하여 신앙생활했는데, 모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경험은 우치무라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1882년 대학교를 졸업한 우치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독립교회를 통해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1884년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 3학년으로 편입하여 명예상을 받고 졸업한 뒤 하트포드 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4개월 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한국교회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라고 해서 불온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무교회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무교회주의는 기존 교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존중한 복음주의이다. 교회가 아닌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라는 오직성서(Sola Scriptura)이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으며, "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일뿐이다. 그러니 나의 신앙은 낡았고 구식이다"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강조하였다.[39] 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가시적인 교회 즉, 예배당이 아닌 성서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윌리엄 S. 클라크는 앰허스트 대학교의 졸업생이자 총장으로, 일본 정부를 도와 삿포로 농업학교(현재의 홋카이도 대학)를 설립하는 데 1년을 보냈다. 그의 주요 역할은 농업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클라크는 성경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한 헌신적인 평신도 선교사였다. 그의 모든 학생들은 개종하여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언약"에 서명했고, 성경을 계속 공부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클라크는 1년 후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우치무라는 남겨진 작은 언약 그룹을 통해 그의 영향을 느꼈다. 그의 ''센파이''(先輩,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선배를 뜻하는 용어)의 상당한 압력으로, 우치무라는 16세에 대학 첫 해에 언약에 서명했고, 1878년 감리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선교 교회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우치무라와 그의 일본인 지지자들은 삿포로에 독립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실험은 현재 무교회주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의 전조가 되었다. 클라크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이 작은 그룹은 종교 기관이나 전문 성직자에 의존하지 않고도 진정한 신앙의 삶을 실천하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영어 저술에는 ''일본과 일본인''(1894)과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1895)가 있으며, 일본식 기독교를 발전시키려는 그의 노력을 반영한다.

우치무라 등 2기생이 입학하기 전,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등 고용 외국인의 강한 감화력에 의해 제1기생은 이미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상급생에게 반항했던 우치무라도, 니토베 이나조와 미야베 킨고가 서명한 것을 계기로, 결국 거의 강제적으로 릿코샤의 이와사키 유키치카와 같은 날에 "예수를 믿는 자의 계약"이라는 문서에 서명하게 된다[9]。 우치무라는 요나탄이라는 크리스천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당시 삿포로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목사 역할을 교대로 맡았다. 그렇게 매주 일요일의 예배를 학내에서 열고, 수요일에는 기도회를 열었다. 개종함으로써, 젊은 우치무라는 신사를 볼 때마다 머리를 숙이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을 기뻐했다.
1878년(메이지 11년) 6월 2일에는, 미국 감리교의 M.C. 해리스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은 젊은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에는 자신들끼리 집회("'''작은 교회'''"라고 우치무라는 부른다)를 열고, 어리지만 진지한 마음으로 신앙과 임했다. 그리고, 감리교회에서 독립한 자신들의 교회를 갖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그 학생 집단을 삿포로 밴드라고 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조직화된 교회가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에 방해가 되며, 성찬과 같은 기독교 성례전이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우치무라의 태도를 공유하게 되었다. 우치무라는 자신의 기독교적 입장을 "무교회주의" 또는 무교회 운동이라고 명명했다.
2. 3. 사회 참여와 평화주의
우치무라는 언론인으로서 아시오 광독 사건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사회 문제에 참여했다.[15]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1일, 도치기현아시카가시의 우애의단에 초청되어 이와모토 요시하루, 키노시타 나오에와 함께 강연했고, 다음 날 키노시타 나오에와 함께 처음으로 아시오를 방문했다. 광독 피해의 심각성을 알게 된 우치무라는 『만초보』에 기사를 써서, 경영자 후루카와 이치베에가 일으킨 인재라고 비판했다.도쿄 간다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쓰다 센을 좌장으로 아시오 광독 문제의 '동정자' 모임이 열렸고, 다나카 쇼조가 설명을 했다. 그 결과 광독 조사 유志회가 결성되었고 우치무라와 이와모토 요시하루가 조사원으로 선정되었다.[15] 1901년(메이지 34년) 6월 21일부터 유志회의 조사가 우치무라를 주사, 다나카 쇼조를 안내역으로 시작되었고, 11월에 조사회의 제1회 보고가 나왔다.
같은 해 7월 20일, 우치무라는 구로이와 루이코, 사카이 토시히코, 코토쿠 슈스이 등과 함께 사회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단을 결성했다. 11월 1일에는 도쿄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아시오 광독 연설회에 아베 이소오, 키노시타 나오에 등과 함께 참석하여 광독 문제가 색욕 문제임을 설파했다. 12월 10일에는 다나카 쇼조의 메이지 천황 직소 사건이 일어났고, 그 가운데 우치무라는 다시 연설회를 열어 후루카와 이치베에를 비판했다.
그러나 1902년(메이지 35년)부터는 운동 참여가 소극적으로 변하여 성경 연구에 집중하게 된다.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1907년(메이지 40년)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간행하여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의 차이를 명확히 했다. 1915년(다이쇼 4년)에는 사회주의가 계급 간의 적개심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21]
1918년(다이쇼 7년)부터 재림 운동을 시작했다. 일본 호리니스 교회의 감독 나카타 주지 등과 협력하여 초교파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재림 강연회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1919년(다이쇼 8년) 6월에는 에비나 단조 등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도 일어났다.
2. 4. 말년과 영향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으로 돌아온 후 교사로 일했지만, 권위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외국 선교 단체의 학교 통제로 인해 여러 차례 해고되거나 사임해야 했다.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와 교육칙어에 깊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거부한 사건이 대표적이다.[20] 종교적 신념이 교직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글쓰기로 전향하여 ''요로즈 조호''의 수석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아시오 광독 사건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연재하면서 대중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러일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적 견해로 인해 언론인 경력도 단절되었다. 그는 자신의 월간 잡지 ''도쿄 잡지''와 ''성서 연구''를 발행하고, 성경 강연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조직화된 교회가 기독교 신앙에 방해가 되며, 성찬과 같은 성례전이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그의 견해를 공유했다. 우치무라는 자신의 기독교적 입장을 "무교회주의"라고 명명했다. 이 운동은 학계, 산업 및 문학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영어 저술에는 ''일본과 일본인''(1894)과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1895)가 있으며, 일본식 기독교를 발전시키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그의 주요 영어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많은 문학 작품을 생산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04년에는 어머니가 사망했고, 동생과의 갈등이 발생하여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우치무라는 기독교인과의 교류를 더욱 원하게 되었고, 츠노하즈 성서 연구회가 재개되었으며, 교우회 결성을 촉구했다.
1888년 메이지 원역 성경 간행 이후, 개역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1905년부터 우에무라 마사히사, 고자키 히로미치 등과 함께 성경 개역 작업을 시작했지만, 공동 작업에 대한 불만으로 중도 하차했다.[20]
1907년 요도바시정 카시와기로 이사 후, 이마이 쇼타로 미망인의 기부로 이마이관이 건립되어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1909년 니토베 이나조의 추천으로 제1고등학교 학생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고, 카시와회로 명명되었다. 1911년에는 야나이하라 타다오 등이 카시와회에 입회했고, 백우회가 발족되기도 했다.
1912년 딸 루츠코가 18세로 요절했다. 1916년 카시와회는 해산하고, 에마오회가 창설되었다. 1918년부터 재림 운동을 시작하면서 카시와 형제단이 결성되었지만, 문하생들의 의사에 의해 사마리아회, 족세회 등 다양한 모임이 생겨났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때는 나가노현에 체류 중이라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가 복음을 전했던 위생회 강당을 잃었다. 1924년 배일법안에 반대하기 위해 도쿠토미 소호와 화해하고, 우에무라 마사히사 등과 "대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1926년 알베르트 슈바이처에게 송금하고, 1927년 슈바이처 후원회를 설립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28년 세례 50주년 기념으로 아오야마 묘지의 해리스 묘를 참배했다. 홋카이도 전도를 돕고, 감리교 삿포로 독립 기독교회 교무 고문에 취임했다. 이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쓰카모토 도라지 등과 무교회주의에 대한 생각 차이로 대립이 격화되어 분리하게 되었고, 이는 우치무라의 병세를 악화시켰다.
1930년 1월 20일 "바울의 무사도" 강연이 마지막이었고, 3월 28일 사망했다.[22] [23] 3월 30일, 성서 연구회 회원장이 치러졌다.[24] 4월 6일, 유언에 따라 우치무라 성서 연구회는 해산식을 거행했고, "성서지연구"는 폐간되었다.
3. 연표
- 1861년 다카사키번 하급 무사의 아들로 에도에서 출생
- 1877년 삿포로 농학교에 관비생으로 입학, 기독교로 개종(17세)
- 1881년 삿포로 농학교 졸업(21세). 홋카이도 개척사 어용 관직 임명.
- 1883년 홋카이도 개척사 어용 관직 사직. 아사다 다케라와 결혼하였으나 6개월 만에 이혼.
- 1884년 미국 유학(24세).
- 1888년 일본 귀국(28세). 니가타 현 호쿠에쓰 가칸 학교 교장직 역임.
- 1889년 요코하마 가즈코와 결혼.
- 1891년 제일고등중학교 불경사건(천황이 서명한 새로운 '교육칙어' 사본 앞에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기를 거부한 사건)으로 교사직 박탈. 아내와 사별.
- 1893년 《구안록》 출간
- 1894년 《전도의 정신》, 《지리 연구》, 《Japan and Japanese》 출간
- 1895년 《How I Became a Christian》 출간
- 1897년 《번영을 위한 최상의 유물》 출간. 《요로즈 조호》(萬朝報) 영문란 주필 역임(37세)
- 1898년 《요로즈 조호》 주필 사임. 평론지 《도쿄 도쿠리츠잣시》(東京独立雑誌) 발행
- 1900년 《도쿄 도쿠리츠잣시》 폐간. 월간지 《세이쇼노 겡큐》(聖書之研究) 창간, 30년간 문필 전도(40세)
- 1903년 고토쿠 슈스이 등과 반전론 제창. 《요로즈 조호》 객원 사임.
- 1930년 도쿄에서 별세(70세)
4. 사상과 신학
우치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교회주의는 기존 교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중시하는 복음주의의 일종이다. 우치무라는 교회가 아닌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근원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임을 믿었고, 자신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라고 고백하며 십자가만을 강조했다.[39]
우치무라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이며,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는 껍데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저서 '구안록'에서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평안을 구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 독립 잡지』 폐간 후, 우치무라는 제1회 하계 강담회를 개최했다. 토메오카 코스케, 마츠무라 카이세키, 오시마 마사타케 등이 강사로 참여했고, 오사나이 후미, 아오야마 토 등 다양한 인물들이 참가했다. 이후 우에다와 고모로에 독립 클럽이 결성되었고, 우치무라는 군마현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펼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00년 10월, 우치무라는 일본 최초의 성서 잡지인 『성서지연구』를 창간하여 죽을 때까지 이끌었다. 또한, 만초호 객원으로 복귀하여 일본어 문장을 기고했다. 『성서지연구』 창간과 함께 성서 연구소를 발족하고, 자택에서 성서 강론을 시작했다. 이는 25명 정원의 가쿠하즈 성서 연구회로 발전했으며, 열성적인 12명은 '가쿠하즈 12인조'로 불렸다.
4. 1. 무교회주의
한국교회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라고 해서 불온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무교회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무교회주의는 기존 교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존중한 복음주의이다. 교회가 아닌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라는 오직성서(Sola Scriptura)이다.[39]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으며, "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일뿐이다. 그러니 나의 신앙은 낡았고 구식이다"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강조하였다.[39] 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가시적인 교회 즉, 예배당이 아닌 성서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우치무라의 추종자들은 조직화된 교회가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에 방해가 되며, 성찬과 같은 기독교 성례전이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우치무라의 태도를 공유하게 되었다. 우치무라는 자신의 기독교적 입장을 "무교회주의" 또는 무교회 운동이라고 명명했다. 우치무라의 운동은 나중에 학계, 산업 및 문학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 많은 도쿄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1901년 3월에는 『성서지연구』의 독자 교통 기관을 목적으로 월간 『무교회』를 발간했다.
4. 2. 사회 참여
일본으로 돌아온 후, 우치무라는 교사로 일했지만 권위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학교를 통제하는 외국 선교 단체로 인해 여러 차례 해고되거나 사임해야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제1고등학교 (당시 도쿄 제국 대학의 예비 부서)에서 열린 공식 행사에서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와 교육칙어에 깊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 교직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글쓰기로 전향하여 인기 신문인 ''요로즈 조호''의 수석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우치무라의 대중 작가로서의 명성은 후루카와 이치베에의 아시오 광독 사건과 관련된 일본 최초의 산업 공해 사건 중 하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연재하면서 굳어졌다.[21]우치무라의 언론인으로서의 경력 또한 단절되었는데, 이는 주로 그의 평화주의적 견해와 신문 칼럼에서 러일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 때문이었으며, 이는 신문의 공식 사설 견해와 충돌했다. 그는 자신의 월간 잡지인 ''도쿄 잡지''와 나중에 ''성서 연구''를 발행하고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도쿄 시내에서 주 500~1000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성경 강연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21]
1892년 1월부터 일본 조합 기독교회의 교바시(京橋) 강론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 후, 조합 교회의 총회에도 참석했다. 불경 사건으로 교원의 길이 막힌 우치무라는 전도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같은 해 여름 지바현(千葉県) 기미쓰군(君津郡) 다케오카 촌(竹岡村)에 체류하며 한 달 동안 열성적으로 전도하여, 8월 25일에 아마하 기독교회(竹岡美以教会)가 설립되었다.[21]

메이지 30년(1897년), 구로이와 루이코가 나고야에 있던 우치무라를 방문하여 조호사(朝報社)에 입사할 것을 간청했다. 우치무라는 망설이면서도 구로이와의 설득에 응하여 조호사에 입사했다. 같은 회사에서 발행하는 신문 『만초보』 영문란 주필이 되었다. 제일고등학교 시절의 제자 야마가타 이소오 등과 함께 총 200여 편의 글을 썼다. 이 글은 외국인계 신문에서 주목을 받았고, 마쓰이 히로키치 등 일본인들에게도 애독되었다. 같은 해 3월 16일에는 영문란에서 아시오 광산의 광독 문제를 다루었다.[21]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1일, 도치기현아시카가시의 우애의단에 초청되어 이와모토 요시하루, 키노시타 나오에와 함께 강연했다. 다음 날인 4월 22일, 키노시타 나오에와 함께 처음으로 아시오를 방문했다. 아시오의 광독 피해의 심각성을 알고 놀란 우치무라는 귀경 후 『만초보』에 기사를 썼다. 이것이 『광독지 유기』이다. 그 속에서 광독 문제의 원인을 경영자 후루카와 이치베에가 일으킨 인재라고 말했다.[21]
5월 21일에는 도쿄 간다의 도쿄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쓰다 센을 좌장으로 아시오 광독 문제의 '동정자' 모임이 열렸고, 다나카 쇼조가 설명을 했다. 그 결과 광독 조사 유志회가 결성되었고 우치무라와 이와모토 요시하루가 조사원으로 선정되었다. 6월 21일부터 유志회의 조사가 우치무라를 주사, 다나카 쇼조를 안내역으로 시작되었다. 11월에 조사회의 제1회 보고가 우치무라, 이와모토 요시하루, 다나카 히로유키, 타카기 마사카츠의 연명으로 나왔다.[21]
11월 1일에는 도쿄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아시오 광독 연설회에 우치무라, 이와모토 요시하루, 아베 이소오, 키노시타 나오에, 시마다 사부로가 참석했다. 우치무라는 광독 문제가 색욕 문제임을 설파했다. 11월 29일에는 키류 교회를 방문하는 도중에 사노역에서 내려 피해지를 다시 방문했다. 12월 10일에는 다나카 쇼조의 메이지 천황 직소 사건이 일어났고, 12월 12일에 다시 도쿄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이와모토, 구로이와, 코토쿠 덴지로(슈스이), 사지 지쓰젠, 미야케 유지로 등과 아시오 광독 연설회를 열었다. 우치무라는 후루카와 이치베에에게 포코를 더하라고 외쳤다. 12월 27일에는 타무라 나오토미를 위원장, 아베 이소오를 감독 위원으로 약 800명의 학생에 의한 광독 피해 시찰 여행이 이루어졌고, 우치무라, 키노시타 등도 동행했다.[21]
그러나 1902년(메이지 35년)이 되자, 4월 2일의 광독 문제 해결 연설회에 참석한 것 외에는 운동 참여가 소극적으로 변하여 성경 연구에 침잠하게 된다. 3월 10일의 이상단 만찬회 석상에서도 사회의 개량 방법을 두고 "우치무라가 개인, 아베가 사회와 개인"이라고 발언하여 아베 이소오와의 차이를 언급했다.[21]
우치무라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을 반복하는 사회주의의 본질적인 기만을 지적함과 동시에,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퇴조를 예언하는 엄격한 비판을 했는데, 이러한 발언을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우치무라의 사회주의 비판 자세는 야나이하라 타다오 등 우치무라의 후계자 일부에게도 이어졌다.[21]
4. 3. 평화주의
우치무라는 청일 전쟁을 지지했지만, 그 전쟁이 가져온 영향들을 보면서 평화주의로 기울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19] 1903년 10월 8일, 여론이 전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자, 우치무라는 《만조보》를 떠났다.[19]《만조보》를 나온 후에도, 우치무라는 『성서지연구』를 통해 계속해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전쟁을 지지했지만, 우치무라는 가시와기 기엔 등과 함께 소수의 비전론자였다. 1904년 크리스마스에 우치무라는 크리스마스는 평화주의자의 날이며,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날을 지킬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치무라는 전쟁에 반대했지만, 징병을 거부하려는 청년에게는 가족을 위해 병역에 복무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 사이토 소지마로가 징병을 회피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우치무라는 직접 그를 설득하여 생각을 바꾸게 했다. 이러한 행동은 무교회 평화주의자 교리에 따른 것으로, "전쟁 자체에 직면했을 때의 무저항"을 의미한다. 우치무라는 "한 사람의 기독교 평화주의자가 전장에서 죽는 것은 불신자의 죽음보다 훨씬 가치 있는 희생"이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병역을 피하지 말라고 했다.
우치무라의 비전론 사상은 "전쟁 정책에 대한 반대"와 "전쟁 자체에 직면했을 때의 무저항"이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는 모든 폭력과 파괴에 항의하는 동시에, "불의의 전쟁 시에 병역을 수용한다"는 행동 원칙을 밝혔다.
5. 저서
- How I Became a Christian영어; 余は如何にして基督信徒となりし乎일본어; 《나는 어떻게 크리스챤이 되었는가》(1986년)
- Representative Men of Japan영어; 『대표적일본인』 (1908년); 《우치무라 간조의 인물 일본사》(조양욱 역, 아침바다, 2003년)
- * 《대표적 일본인》 (기파랑, 2011년)
- 『基督信徒のなぐさめ』 - 1893년 우치무라 간조의 처녀작. 무교회라는 단어가 최초로 사용된 작품이다. 이와나미 문고 (1976년).
- 『求安録』(1893년); 《구안록》 (포이에마, 2016년)
- * 김유곤 옮김, 크리스챤서적, 2006년
- 《ロマ書の研究》 (1957); 《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연구》 (김유곤 역, 크리스챤서적, 2002년)
- 《一日一生》; 《일일일생》(안진희 역, 홍성사, 2004년)
- 『内村鑑三所感集』; 《소감 - 복음 그 진리와의 대화》(김유곤 역, 크리스챤서적, 2011년)
-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 내 영혼의 항해 일지》(양혜원 역, 홍성사, 2001년)
- 《사랑의 샘가에서》 (범우사, 2013년)
- 《내촌감삼 : 우찌무라 간조 성서주해》 (바이블넷, 2013년)


- ''How I Became a Christian''
- * 한국어 번역: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이와나미 문고) 외 다수
- ''Representative Men of Japan'' (『대표적 일본인』 이와나미 문고, 이후 와이드판) 1908년 - ''Japan and Japanese'' (1894년)의 개정판
- : 헤르만 헤세의 아버지인 요하네스 헤세는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를 1905년에, ''Representative Men of Japan''를 1908년에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 독일어 번역본은 슈투트가르트의 D. 군데르트사에서 간행되었는데, 이 회사의 대표였던 군데르트는 요하네스의 의형제였으며, 그의 아들인 빌헬름 군데르트는 1906년에 우치무라를 사모하여 일본을 방문했고, 이후 독일의 일본학에 크게 기여하는 연구자가 되었다.[33]
- 『기독 신도의 위로』 - 1893년 우치무라 간조의 처녀작. '무교회'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작품이다. 이와나미 문고 (1976년, 개정 2021년).
- 『구안록』 - 경성사・복음사 (1893년 8월). 이와나미 문고 (1939년).
- 『지인론』 - 처음에는 『지리학고』라는 서명으로 간행 (경성사, 1894년 5월). 제2판 (1897년 2월)에서 『지인론』으로 개제. 이와나미 문고 (1942년).
- 『후세에 남길 최대의 유산』 - 1894년 7월 기독교도 하계 학교에서의 강연을 정리한 것. 1897년, 벤리도에서 간행
- 『덴마크국의 이야기』 - 1911년 이마이관에서의 강연을 정리한 것. 부제는 '신앙과 수목으로 나라를 구원한 이야기'. 같은 해의 '성서지연구' 제136호에 게재
- * 『후세에 남길 최대의 유산・덴마크국의 이야기』 (이와나미 문고, 개정 2011년)
- '''『우치무라 간조 전집』 전 40권'''[34], 이와나미 서점, 1984년 완결
- 『우치무라 간조 선집』 전 8권[35], 이와나미 서점 1990년
- 『우치무라 간조 소감집』 스즈키 토시로 편 이와나미 문고
- 『기독교 문답』 고단샤 학술 문고
- 『우치무라 간조/오카쿠라 텐신』 신학사: 근대 낭만파 문고, 2004년
- : 사이고 다카모리 (스즈키 노리히사 역), 단테와 괴테, 내가 비전론자가 된 유래, 환희와 희망, 소감 10년을 수록.
- 『우치무라 간조의 전도론 - 왜 종교가 필요한가』 신・교양의 대륙 시리즈, 행복의 과학 출판, 2016년 3월 발행.
6. 한국 교회에의 영향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은 제자로는 한국의 무교회주의 개신교 운동가인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최태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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